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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세기 신라의 형률과 그 운용 7~8세기 신라의 형률과 그 운용 -君臣關係에 관한 형률 적용 사례를 중심으로- 한영화* Ⅰ. 머리말 Ⅱ. 신라 형률의 양상과 운용 1. 君主權 保衛에 적용된 형률례 2. 官吏規制에 관한 형률 적용례 Ⅲ. 신라 형률의 성격-‘五逆’을 중심으로 Ⅴ. 맺음말 국문초록 1) 신라는 6세기 경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체계적인 법체계를 수용한다. 이 를 통하여 기존의 고유한 관습법을 확대, 체계화하여 성문의 율령체계를 갖추 어 나갔다. 7세기를...

@7~8세기 신라의 형률과 그 운용
7~8세기 신라의 형률과 그 운용 -君臣關係에 관한 형률 적용 사례를 중심으로- 한영화* Ⅰ. 머리말 Ⅱ. 신라 형률의 양상과 운용 1. 君主權 保衛에 적용된 형률례 2. 官吏規制에 관한 형률 적용례 Ⅲ. 신라 형률의 성격-‘五逆’을 중심으로 Ⅴ. 맺음말 국문초록 1) 신라는 6세기 경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체계적인 법체계를 수용한다. 이 를 통하여 기존의 고유한 관습법을 확대, 체계화하여 성문의 율령체계를 갖추 어 나갔다. 7세기를 거치면서 이러한 율령은 통치체제를 재편하고 군주를 중심 으로 하는 수직적 질서를 강화시키는 중심축으로 작용하였다. 7세기는 중국에서 통일왕조인 수와 당의 등장으로 동아시아 판도의 지각변 동을 예고하는 한편, 한반도에서는 적극적인 영역확장으로 삼국이 팽팽한 접전 을 벌이다 결국 신라와 발해로 재편되는 상황이었고, 일본 또한 이러한 판도 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였다. 결국 7~8세기를 거치면서 * 성균관대학교 강사 * 대표논저 : 2005 「고대사회의 성별 분업과 여성노동」 역사연구 15, 역사학연구 소 ; 1999 「高句麗 地母神信仰과 母處制」 史學硏究 58‧59 ; 2001 韓國古代史 의 諸照明 , 신서원. 230 한국고대사연구 44(2006. 12)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는 새롭게 재편되었고, 이후 안정화된 사회 속에서 서로의 관계는 재정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나 당의 역사적 경험이 농축된 율령을 중 심으로 한 통치체제는 한반도와 일본으로 확산되었고, 이는 동아시아 사회를 관통하는 하나의 통치질서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동아시아를 관통하는 이러한 율령 체계는 신라에서도 전통을 극복하는 방편으로서 적극 활용되었지만, 여전 히 이전의 전통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본고에서는 7~8세기 신라 형률의 운용문제를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 써 이 시기 형률의 양상을 추적해보았다. 그리하여 지배층 내부 질서를 중심으 로 한 군주권의 보위, 관리에 대한 규제 그리고 五逆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 루었다. 군주권의 보위와 관련해서는 反․大逆․叛罪를, 관리에 대한 형벌은 非常時의 전쟁과 常時의 公的 직무, 그리고 범법행위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형벌들은 관리에 대한 견제와 규제로 궁극적으로는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수직적 관계의 확인이며, 공적 질서를 확립하려는 신라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일련의 사례 검토를 통해 형률의 형식적인 측면보다는 운용에서 다 양성이 드러나게 되는데, 결국 이는 형률의 존재의미가 군주권 수호에 있었다 고 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五逆, 당의 十惡, 일본의 八虐의 연관성을 통해, 신라의 五逆 은 당률의 수용과정에서 이전 시기의 전통적 관념이 투영된 하나의 변용으로 서 이해하였다. 즉 동아시아 각국에서의 형률은 公法的 법규로서, 국가나 군주 의 안녕과 이를 통한 지배층의 질서유지라는 궁극적 목표를 추구한다는 면에 서 어느 정도 동질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전 사회와의 연관성 혹은 현 사회의 상황에 따라서 변용이 나타나기도 한 것이었다. 주제어 : 형률, 군주권, 동아시아, 五逆, 十惡, 八虐 Ⅰ. 머 리 말 사회규범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일정한 사회적 행위를 당위적으로 의 무지울 것을 요구하는 관념이다. 또는 사회에 있어서 그 집단의 표준으 로 되어 있는 태도나 행동의 형태를 사회적 규범이라고도 한다. 사회규 7~8세기 신라의 형률과 그 운용 231 범은 인류 역사상 사회가 발생한 이래로 구성원들의 행동을 규제해오는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있다. 그것은 관습의 형태로, 도덕의 형태로, 종교의 형태로 또는 더 나아가 법의 형태로 인간의 행위를 규제한다. 이러한 규범․규율은 각각 그 사회에서의 질서유지와 사유재산의 보 호를 위해서 기능하며, 이후 국가의 발달에 따라 불문률이었던 규율들이 체계화된 성문법으로 전환된다. 이 과정은 삼국에서 활발한 대중국 관계 속에 수반한 율령의 수용으로 나타난다. 각각의 사회는 그 자체의 내적 발달에 의해 형성된 규범․관습을 토대로 외적 영향 하에서 발생된 새로 운 법률체계를 수용한다. 三國史記 에 의하면, 율령의 반포는 고구려에 서는 불교의 공인과 태학의 성립과 함께 소수림왕 3년(373)에 이루어졌 으며 신라에서는 법흥왕 7년(520) 백관의 공복과 그 秩이 정해지는 것과 함께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시기 율령의 문제는 일본의 ‘律令國家’의 성 립과 궤를 같이하여 한국의 고대사를 파악하려는 의도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기도 하였다.1) 그러나 이후 율령의 조항 복원이라든지2) 금석문 발견에 따른 율령반포의 사실 확인의 작업으로3) 한반도에서의 율령 반포는 의미를 찾게 되었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삼국 율령의 전 개과정을 ‘연좌제’․‘형률’․‘대민지배’ 등 구체적인 주제를 통해 설명하 려는 연구들이 계속되었고4) 최근에는 물질자료적인 측면에서 율령의 시 1) 林紀昭, 1967 「新羅律令に關する二三問題」 法制史硏究 17 ; 井上秀雄, 1974 「朝鮮․日本における國家の成立」 世界歷史 6, 岩波書店 ; 武田幸男, 1974 「新羅法興王代の律令と衣官制」, 古代朝鮮と日本 , 學生社 ; 北村秀人, 1982 「朝鮮における律令制の變質」 日本古代史講座 7, 學生社. 2) 田鳳德, 1956 「新羅律令考」 韓國法制史硏究 ; 盧重國, 1979 「高句麗律令에 關한 一試論」 東方學誌 21 ; 盧重國, 1986 「百濟律令에 대하여」 百濟硏究 17 ; 李仁哲, 1994 「新羅律令의 篇目과 그 內容」 정신문화연구 54 ; 韓容根, 1999 「高麗以前의 古代刑律」 高麗律 , 書景文化社. 3) 李基東, 1978 「新羅 官等 制度 关于办公室下班关闭电源制度矿山事故隐患举报和奖励制度制度下载人事管理制度doc盘点制度下载 의 成立年代 問題와 赤城碑의 發見」 歷史學報 78 ; 金龍善, 1982 「新羅 法興王代의 律令頒布를 둘러싼 몇 가지 問題」 加羅 文化 1 ; 朱甫暾, 1989 「蔚珍鳳坪新羅碑와 法興王代 律令」 韓國古代史硏究 2. 4) 朱甫暾, 1984 「新羅時代의 連坐制」 大丘史學 25 ; 韓容根, 1991 「三國時代의 刑律硏究」 韓國史의 理解-古代考古編 , 신서원 ; 姜鳳龍, 1992 「三國時期의 232 한국고대사연구 44(2006. 12) 행을 찾으려는 연구도 진행되었다5). 또한 비교적 사료가 많이 남아있는 신라의 중대를 중심으로 중국의 형률과의 관계를 규명하면서 신라의 법 체계가 고유법적 측면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음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기 도 했으며,6) 단순히 변하지 않는 고정불변의 법체계가 아닌 지속적으로 修撰․擴充되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7) 어느 사회건 주변 사회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다. 그것이 전쟁과 같 은 적대적 관계가 되었든 교역 등의 우호적 관계가 되었든, 이러한 관계 들은 서로의 사회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곧 통시대적으로 관철되어온 그 사회의 고유한 것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 고 대체가 되기도 하고 융합이 되기도 한다. 삼국에서 형벌체계라고 하 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삼국 각국은 고유의 관습법적인 질 서 속에서 확대되고, 체계적인 법체계로서의 율령을 받아들였으며, 수용 된 율령은 각 사회에서의 관습법과의 관계속에서 시행과 착오를 거듭했 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7세기 국제전을 거치면서 또다른 국면에 접어들게 된 다. 이 시기는 중국에서 통일왕조인 수와 당의 등장으로 동아시아 판도 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한편, 한반도에서는 적극적인 영역확장으로 삼 국이 팽팽한 접전을 벌이다 결국 신라와 발해로 재편되는 상황이었고, 일본 또한 이러한 판도 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 였다. 결국 7~8세기를 거치면서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는 새롭게 재편되었 고, 이후 안정화된 사회 속에서 서로의 관계는 재정립되는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수나 당의 역사적 경험이 농축된 율령을 중심으로 한 통치 律令과 ‘民’의 存在形態」 韓國史硏究 78. 5) 山本孝文, 2005 韓國 古代 律令의 考古學的 硏究 ,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6) 尹善泰, 2003 「新羅 中代의 刑律-中國律令 受容의 新羅的 特質과 관련하여」 강좌한국고대사 3 ; 洪承佑, 2004 「新羅律의 基本性格-刑罰體系를 중심으로」 韓國史論 50. 7) 盧鏞弼, 2002 「新羅時代 律令의 擴充과 修撰」 洪景萬敎授停年紀念 韓國史學 論叢 . 7~8세기 신라의 형률과 그 운용 233 체제는 한반도와 일본으로 확산되었고, 이는 동아시아 사회를 관통하는 하나의 통치질서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이 시기 신라의 형률을 중심으로 해서 동아시아사회에 관 통하는 통치 질서인 율령의 한 부분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군주권의 보위와 관련된 反․大逆․叛, 즉 국가안위의 유지하는 데 필요한 죄와 벌의 양상을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전쟁과 일상적인 직무수행 등과 관 련하여 관리에 대한 규제 사례를 통해 왕권의 통치 행위를 검토할 것이 며, 그리고 중죄로서 사면의 제외대상이 되고 있는 신라의 ‘五逆’을 중심 으로 하여 동시기 동아시아 사회에서의 형률의 전개 양상을 가늠해보고 자 한다. Ⅱ. 신라 형률의 양상과 운용 당의 律은 전국시대 이래 국가제정법 발달의 결과로서 특히 위진이래 빈번히 행해진 율령의 편찬, 개정사업의 최후의 완성으로 나타난 법전이 며 그 기본적 틀은 수의 ‘개황률’(581년)에서 만들어졌다. ‘개황률’에서는 死刑, 流刑, 徒刑, 杖刑, 笞刑의 5종의 형이 정해졌고,8) 死刑도 이전보 다 단순화하여 斬首와 絞首 두 가지로 하였으며 혹형을 없애는 등 “輕 刑으로 重刑을 대신하고, 死刑을 生刑으로 바꾸며, 조문이 많은 것은 쳐 서 간략하게 만든다. 복잡한 격식과 무거운 형벌은 아울러 모두 삭감하 여 폐지한다.”라는 기본적인 원칙이 적용되었다.9) 이는 당률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당은 무덕 7년(624) 수의 ‘대업률’을 폐지하고 ‘개황률’에 따 라 ‘무덕률’을 제정하였으며,(624) ‘정관률’(637), ‘영휘률’(651), ‘개원 률’(737) 등의 개정이 있었다. 그 형벌체계는 수 ‘개황률’을 대체적으로 8) 북주, 북제 때에 확립된 것이다. 9) 隋書 卷25 「志」20 刑法. 234 한국고대사연구 44(2006. 12) 답습하고 있어 笞杖徒流死의 5형이 규정되고 流刑에 다소 변동이 가해 진 것 이외에는 거의 변화가 없다.10) 일본과 같은 경우 율․령이 갖추어져 편찬, 시행된 것은 대보율령부 터이다.11) 일본 형벌의 경우 大化 前代에는 神判이 행해지고 살인죄, 강 도죄, 간음죄에 대해서 死刑, 장물에 대해서는 賠償制가 적용되었으며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유형과 장형이 처해지기도 함으로써12) 일본 고유의 神判과 같은 관습법적인 요소와 중국의 율령적 요소가 함께 나타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3) 天武 5년(677) 8월에 내려진 사면령에 ‘三 流’와 ‘徒罪’ 등의 문구가 보여 율령의 시행을 가늠하기도 하며 또한 持 統 3년(689) 淨御原令이 시행된 이후로 일본에서도 이전과는 달리 十惡 이 언급되는 등 당의 律이 적용되는 구체적인 예들을 찾을 수가 있다. 일본의 율령은 중국율령의 틀을 거의 그대로 모방, 계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14) 신라의 경우는 법전의 편찬이 확인되고 있지 않다. 다만 그 정황상 당 의 율령을 신라 또한 적극적으로 수용했을 가능성은 높다. 640년대 이후 로 활발해진 신라의 대당관계를 통해 이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라는 648년 이후 진덕왕 3년(649) 중국 의관제 수용, 진덕왕 4년(650) 당 연호 사용(永徽), 진덕왕 5년(651) 賀正禮의 시작 등 당의 제도를 적 10) 仁井田陞, 1959 中國法制史硏究(刑法) , 東京大學出版會, p.110. 11) 李貞姬, 1991 「6,7세기 日本史에서 律令受容의 過程과 意味」 韓國古代史硏 究 4, p.24. 12) 隋書 卷81 「列傳」46 倭國. 13) 중국 南朝의 경우 梁, 陳에 이르기까지 流刑은 형벌체계에 속하지 않았으나, 北朝의 경우는 流刑이 사형 다음가는 중형으로 자리잡는다고 한다. 또한 북위 나 북제의 경우 流刑에 대해 거리에 따른 등급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北周부터 는 거리에 대한 차등이 이루어진다고 한다.(洪承佑, 2004 앞의 논문, pp.13~15) 14) 李貞姬는 일본의 율령제 도입을 7세기초 부분적 도입→7세기 중엽 전면적 도 입→7세기 후반 법전편찬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李貞姬, 1991 앞의 논문) 이러한 과정을 겪은 대보율령은 당의 永徽律令을 참고하고 있다.(李貞姬, 1991 앞의 논문, p.24) 7~8세기 신라의 형률과 그 운용 235 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또한 이 연장선상에서 진덕왕 6년(652) 파진찬 天 曉를 左理方府令으로 삼고, 무열왕 원년(654) 理方府令 良首 등에게 명 하여 율령을 ‘詳酌’하여 理方府格 60여 조를 ‘修定’하는 등의 조치가 보 인다. 이러한 신라의 적극적인 당 제도 수용은 외부적으로는 백제와 고 구려의 관계 속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방편의 하나였고, 내부적으로는 中央集權的 貴族官僚體制로 나아가고자 했던 과정 중의 하나였다. 이 러한 과정은 백제․고구려의 멸망과, 당과의 전쟁을 거쳐 전쟁이 끝나는 676년 이후 다시 이어져 문무왕 18년(678) 左右理方府에 卿을 각 1인씩 을 더 두고 문무왕21년(681) 遺詔에서는 律令格式의 ‘改定’이 언급되기 도 한다. 당 제도의 적극적 수용과 함께 이루어진 율령 관련 조치들은 결국 기 존의 율령을 당의 율령을 통해 신라의 사정에 맞춰 개정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사정을 실질적인 적용이라는 측면에서 형 률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군신관계에서 군주권 보위와 관리 의 규제적 측면에서 적용되는 형벌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君主權 保衛에 적용된 형률례 국가가 발전함에 따라 나라에 위해를 가하는, 즉 사직을 위태롭게 하 거나 나라를 배신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최고의 형벌을 가하게 된다. 이 에 해당하는 죄를 謀反, 大逆, 謀叛罪로 구분할 수 있다. 당률에서는 謀 反, 大逆, 謀叛罪는 十惡의 세 항목으로서15) 법정 최고형인 참형 등의 15) 수, 당 十惡의 1,2,3 조항에 해당한다. ‘反’은 社稷을 위해하는 것이다. 天子에 게 危害를 가하려는 것으로, 황제의 폐위·시해를 직접 행하거나 궁극적으로 그것으로 이어지는 성질의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정통의 現王朝에서 이탈 하여 외국 또는 괴뢰 政權側에 붙는 것이 ‘叛’이다. 즉 나라를 배반하고 적국 을 따르려고 꾀함을 말한다. ‘反’과 ‘叛’의 차이는 조정을 향해 정면으로 공격 하는가, 조정에 등을 돌리고 이탈하는가의 차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叛과 亡(도망) 사이에는 근사성이 있다. 만약 한 곳을 점거하여 官軍에 철저히 236 한국고대사연구 44(2006. 12) 형벌을 가하고 있다.16) 수와 당에서는 謀反이나 反의 경우 대부분 “伏 誅”되거나 “討平”으로 표현된다. 이들 중에서는 擧兵하여 天子나 王으 로 自稱하거나 建元하는 경우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17) “伏誅”되거나 “討平”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주된 사형의 형태는 당률에 의하면 斬刑 을 의미할 것이다.18) 수나 당에서 叛은 “叛亡”, “叛歸” 등으로 쓰이며 배반하여 이탈해나가는 모습을 주로 보여준다. 이러한 叛의 경우는 주로 反罪와 같이 “伏誅” “討平”으로 표현되는데 그 구체적인 처벌의 내용은 참형이나 교형에 처해졌을 것이고 이미 叛이 실행되었을 때는 참형이 처 해지고 있다.19) (가)-1 唐 武德 4년(621) 竇建德을 長安市에서 참하였다.( 新唐書 卷85 「列傳」10 竇建德) (가)-2 唐 開耀 元年(681) 10월 丙寅日 阿史那伏念과 溫傅 등 54인을 都市 에서 참하였다.( 舊唐書 卷5 「本紀」5 高宗下 永隆2年․開耀元年 10월 丙寅) (가)-1․2의 사료는 당에서의 反叛罪에 대한 처벌을 그 내용으로 하 고 있다. 竇建德, 阿史那伏念 등은 모두 “市”에서 斬刑에 처해지고 있 다. 당령에 의하면 사형집행이 원칙적으로 저자[市]에서 이루어지는 공개 형이다.20) (가)의 경우는 율령에 의한 절차에 따라 진행된 형벌로 보인 항전한다면 그것은 ‘叛’이 아니라 ‘反’이 된다. ‘大逆’은 종묘, 산릉 및 궁궐을 훼손하는 것을 말한다. 즉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조영물을 파괴하고 이로써 황제의 권위에 중대한 모욕을 가한 행위를 의미한다.( 唐律疏議 卷1 名例1 第6條 十惡 : 任大熙․金鐸敏 主編, 1994 譯註 唐律疏議-名例編 , 한 국법제연구원, pp.108~110) 16) 唐律疏議 卷17 賊盜1 第248條 謀反大逆․第251條 謀叛. 17) 특히 수의 경우 수 말기, 즉 大業10년, 11년, 12년 13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 고 있다. 18) 謀叛이나 謀大逆일 경우는 絞首刑이지만 이미 실행된 경우는 斬首刑이다. 19) 예를 들면, 舊唐書 卷16 「本紀」16 穆宗 長慶元年以前, “八月 … 甲戌 安南 都護桂仲武 斬叛將楊淸首以獻 收復安南府”와 같은 경우이다. 7~8세기 신라의 형률과 그 운용 237 다. 수나 당에서 謀反, 大逆, 謀叛에 대한 사형은 대부분 “伏誅”와 “討 平” 등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이렇듯 그 내용은 형률에 따라 참형과 교 형으로 집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형 외에도 형률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腰斬, 梟首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수의 경우 ‘개황률’에서 전 대의 梟首刑, 轘裂刑, 鞭刑 등을 삭제했지만,21) 楊玄感의 동생 積善은 車裂刑에다 불태워 흩뿌려졌고,22)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송환된 斛斯政 은 支解刑을 받았으며23) 煬帝를 시해하려고 모의했던 宇文智及 등은 梟首刑에 처해졌다.24) 또한 당 태종대 謀反한 劉蘭은 腰斬에 처해졌는 데 丘行恭이 유란의 心肝을 먹자, 태종이 나라에는 常刑이 있음에도 그 와 같음을 꾸짖기도 하였으며,25) 측천대에는 裴匪躬 등이 사사로이 皇 嗣를 알현한 것으로 요참형을 받았다.26) 이러한 상황들로 보아 모든 형 률이 꼭 규정된 대로만 행해진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적 형벌들은 모두 이전시기까지 행해져왔던 사형의 방법들이었고, 수, 당대 이미 사형의 규정이 斬刑과 絞刑이라 하더라도 실제 적용함에 있어서는 상황에 따라 규정 외적인 형벌이 가해졌던 것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하겠 20) 5품 이상이 惡逆 이상의 죄를 범하지 않는 경우는 집에서 스스로 죽는 것을 허용하고, 7품 이상 및 황족 또는 부인이 범한 죄가 참수형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 모두 은밀한 곳에서 교수형을 집행한다.( 唐令拾遺 獄官令 8조 ; 唐六 典 卷6 尙書刑部 : 김택민 주편, 2003 譯註 唐六典(上) , 신서원, p.598) 21) 隋書 卷25 「志」20 刑法 ; 唐六典 卷6 尙書刑部. 22) 隋書 卷4 「帝紀」4 煬帝下 大業9年 12월 甲申. 양현감은 宇文述 등에게 斬되 었다.( 隋書 卷4 「帝紀」4 煬帝下 大業9年 8월 壬寅) 23) 隋書 卷4 「帝紀」4 煬帝下 大業10年 11월 丙申 ; 隋書 卷70 「列傳」35 斛斯 政. 隋書 列傳에 의하면 곡사정을 기둥에 묶어놓고 公卿百僚가 활을 쏘아맞 혔고 그 고기를 저며 씹어먹은 자들이 많았으며 씹은 후 삶아버렸다. 그리고 그 나머지 뼈를 모아 태워서 흩뿌렸다고 한다. 24) 舊唐書 卷54 「列傳」4 竇建德. 25) 舊唐書 卷3 「本紀」3 太宗下 貞觀17年 正月 戊辰 ; 資治通鑑 卷196 「唐紀」 12 太宗貞觀17年 正月. 26) 舊唐書 卷6 「本紀」6 則天皇后 長壽2年 2月 ; 資治通鑑 卷205 「唐紀」21 則天后 長壽2年 正月. 238 한국고대사연구 44(2006. 12) 다. 당과 마찬가지로 신라 또한 군주권에 대한 도전, 즉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최고의 형벌을 가하였다. (나)-1 진평왕 53년(631) 5월, 이찬 柒宿과 아찬 石品이 謀叛하였다. 왕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붙잡아 東市에서 斬하고 아울러 九族을 멸하였다. … (석품은) 몰래 집에 이르렀다가 잡혀 伏刑을 받았다. ( 三國史記 卷4 「新羅本紀」4 眞平王 53년 5월) (나)-2 태종무열왕 7년(660) 8월, 毛尺을 붙잡아 斬하였다. 모척은 본래 신 라 사람으로 백제에 도망한 자인데, 대야성의 黔日과 함께 도모하 여 성이 함락되게 하였기 때문에 斬하였다. 또 검일을 잡아 (죄목 을) 세어 말하기를 “네가 대야성의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질러 없앰으로써 온 성 안에 식량을 모자라 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요, 品釋 부부를 윽 박질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요,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하였 으니 그것이 세번째 죄이다.” 이에 사지를 찢어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三國史記 卷5 「新羅本紀」5 太宗武烈王 7년 8월) 사료 (나)는 신라에서의 叛․謀叛罪와 그 처벌에 대해 언급하고 있 다. (나)-1에서는 진평왕대 칠숙 등이 謀叛하여 斬刑을 받고 있으며, 그 장소로서 “東市”가 등장한다. 신라에서도 모반에 대한 사형 집행이 “市” 라는 공간에서 공개적으로 참형이 가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공개 적으로 형을 집행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위협과 일반 예방이라는 형벌 그 자체가 가지는 보편적 의미와 함께,27) 제의적인 측면도 포함하고 있 다.28) 고구려에서도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 場에서 불로 태워 문드러지 27) 니시다 다이이찌로 지음․천진호 외 옮김, 1998 중국형법사연구 , 신서원, pp.90~92. 28) 처형은 신이 강림하여 머무는 곳에서 범죄자를 희생으로 바치는 제례의식으로 거행되었을 것이며, 異族과의 전쟁포로나 패배자는 異神의 저주나 위험을 차 단하기 위해서 시에서 처형되었을 것이다.(李成九, 1996 中國古代의 呪術的 思惟와 帝王統治 , 서울대박사학위논문, pp.47~48 ; 金昌錫, 1997 「한국 고대 7~8세기 신라의 형률과 그 운용 239 게 한 후 참형에 처하고 있는데,29) 그 공간이 어디였는지 나타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고구려 신대왕 2년 “棄之市朝”와 백제 삼근왕 2년 熊津市 에서의 斬刑으로30) 보아 사람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이며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장소는 市일 것이다. 신라에서도 사료 (나)-1 칠숙의 “斬之東市”에서 보이듯이 叛罪에 대한 형벌은 바로 저자에서의 참형이 며 이러한 사형집행은 도화녀의 “斬于市”31) 언급처럼 일반적인 형태로 보인다.32) 그러나 사료 (나)-2는 (나)-1과는 사뭇 다른 상황을 보여준다. 바로 신 라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라인으로 백제로 도망간 毛尺과 도모하여 성이 함락되도록 한 黔日의 예이다. 모척과 검일은 反叛罪가 적용될 것 이다. 무열왕은 사위와 딸 그리고 주요 거점인 대야성을 잃었다는 점에 서 검일에게 支解刑과 강물로 던지는 형벌을 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 에 던져진 것 또한 하나의 형벌로 보여지는데, 백제 무령왕 원년(501)에 加林城을 근거로 叛한 佐平 苩加는 斬하여 白江으로 던져졌고,33) 신라 市의 原形과 그 성격 변화」 韓國史硏究 99․100, p.79) 28) 市는 종래 제의의 중심이자 정무의 중심, 처형과 사면의 장소, 재화의 재분배 장소로서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후 더 이상 정치, 종교적 성격이 탈각되고 경제적 성격이 전면에 드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전의 전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어서 여전히 대역죄인을 처형하고 하늘에 대한 맹세가 행해 지는 시의 원초적 성격이 관념적으로 남게 된다고 한다.(金昌錫, 1997 앞의 논 문) 29) 舊唐書 卷199上 「列傳」149上 東夷 高麗. 30) 三國史記 卷16 「高句麗本紀」4 新大王 2년 ;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4 三斤王 2년. 31) 三國遺事 卷1 第2 紀異編上 桃花女鼻荊郞. 32) 홍승우는 신라 중고기 율로 규정된 두 가지 사형방식을 공개형인 棄市와 비공 개형인 斬으로 설명한다. 실제 집행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신 라와 관계된 사료에서는 그 모습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며 일반적으로는 참 수의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한다.(洪承佑, 2004 「新羅律의 基本性格- 刑罰體系를 중심으로」 韓國史論 50, pp.26~27) 33)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4 武寧王元年 正月. 33) 대표적인 예는 고구려 중천왕대 관나부인에게 죄를 물어 가죽주머니에 넣어 240 한국고대사연구 44(2006. 12) 에서 조정의 花主가 익선을 잡아서 그 더러운 때를 씻으려 했으나[洗浴] 익선이 도망쳐 숨어버렸기 때문에 그의 長子가 붙들려 결국 추운 날 성 안 못 가운데서 얼어죽었다라는 기록에서도34) 물과 관련된 형벌이 확인 된다. 이는 죽은 사람을 땅에 매장치 못하게 하여 영혼의 안식처를 빼앗 는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35) 더 나아가서 익선의 “洗浴” 은 정화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36) 이러한 물과 관련된 것 이외 에도 고구려의 경우는 “反叛을 꾀한 자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횃불을 들 고 서로 다투어 지지게 하여, 온 몸을 태워 문드러지게 한 뒤에 참수”하 는 불과 관련된 형을 집행한다.37) 고구려의 이러한 ‘불의 의식’은 고구려 가 갖고 있던, 율령과 상관없이 그들에게 침투되었던 고유의 儀式的인 한 단면으로 보여진다. 이렇듯 反叛罪에 해당하는 사형집행에서 나타나 는 물이나 불은 이전까지 그들이 해왔던 전통적인 형집행과 관련이 있어 보이며, 형률에 입각한 사형을 집행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러한 儀式的인 요소들이 덧붙여져 그 가혹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反叛罪에 대해 신라 중대를 중심으로 하대까지 三國史記 에 는 모두 “伏誅”로 표현되고 있다.38) “伏誅”는 ‘죽임을 받는다’라는 일반 서해로 던져버린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三國史記 卷17 「高句麗本紀」5 中 川王4년) 34) 三國遺事 卷2 紀異2 孝昭王代竹旨郞. 여기에는 효소왕대의 일로 되어 있으 나, 진평왕대로 보는 견해도 주목된다.(金哲埈, 1990 「新羅 貴族勢力의 基盤」 韓國古代社會硏究 , 서울대학교 출판부, pp.330~334 ; 李昌勳, 1999 「7세기 신라 民의 재편과정」 韓國古代史硏究 16, pp.429~431) 35) 邊太燮, 1959 「韓國 古代의 繼世思想과 祖上崇拜信仰(下)」 歷史學報 4. 36) 서양에서도 고대와 중세 형벌에 대해 지적되는 것이 형벌 혹은 처형이 제사, 제물과 관련되어 일종의 주술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이다.(阿部謹也, 1978 刑 吏の社會史-中世ヨ-ロッパの庶民生活 , 中央公論社) 제사의 제물은 각 사회나 부족이 신봉하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고, 그렇게 해서 신의 노여움을 가라앉 힌다. 또 신의 판단에 복종하고 신에 대해 지은 죄를 속죄하며 그렇게 해서 정 화를 도모했으니 이것이 처형인 것이다.(도미야이따루(富谷至) 지음 임병덕․ 임대희 옮김, 1999 유골의 증언-古代中國의 刑罰- , 서경문화사, pp.192~193) 37) 舊唐書 卷199上 「列傳」149上 東夷 高麗. 7~8세기 신라의 형률과 그 운용 241 적인 의미로서 죽임의 특별한 형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 율에 의해 공식적으로 행해지는 죽임의 형태를 나타낼 가능성은 높다.39) 그렇다고 한다면, 신라 중대 이래로 “伏誅”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신라에 서 정한 사형의 형태가 대체적으로 적용되었을 것이다. 물론 예외적 상 황이 있을 수 있지만, 이전까지 있어왔던 고유한 관습법적인 요소들은 점점 탈각해나가고 형률에서 정해진 대로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었을 것 이기 때문이다.40) 이는 당률의 도입으로 인하여 복잡한 격식과 무거운 38) 7세기 중반에서 8세기 말까지 三國史記 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선덕왕 16 년(647) 비담과 염종 등 謀叛․擧兵 “誅”, 문무왕 13년(673) 아찬 大吐 謀叛 “伏誅”, 신문왕원년(681) 소판 金欽突 등 謀叛 “伏誅”, 신문왕 4년(684) 장군 大文 謀叛 “伏誅”, 효소왕 9년(700) 이찬 慶永 謀叛 “伏誅”, 효성왕 4년(740) 波珍飡 永宗 謀叛 “伏誅”, 혜공왕 4년(768) 一吉飡 大恭․阿飡 大廉 謀叛 “討 平”, 6년(770) 대아찬 金融 叛 “伏誅”, 11년(775) 6월 이찬 金隱居 謀叛․8월 이찬 廉相, 前侍中 正門 謀叛 “伏誅”, 16년(780) 伊湌 金志貞 叛 “誅” 39) 당의 경우 정관13년 突利可汗의 아우인 結社率,( 舊唐書 卷3 「本紀」3 太宗下 貞觀13年 4월 甲申 ; 資治通鑑 卷195 「唐紀」11 太宗貞觀13년 4월 甲申) 영 휘4년 房遺愛․薛萬徹․柴令武,( 舊唐書 卷4 「本紀」4 高宗上 永徽4년 2월 乙酉 ; 資治通鑑 卷199 「唐紀」15 高宗 永徽4년 2월 甲申) 개원19년 張審素 ( 舊唐書 卷8 「本紀」8 玄宗上 開元19年 12월 ; 資治通鑑 卷213 「唐紀」29 玄宗 開元 19년 12월)는 舊唐書 에는 “伏誅”로 되어 있지만 資治通鑑 에서 는 그 구체적인 형으로서의 “斬”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神功원년 來俊臣 처럼 舊唐書 에는 “伏誅”로 되어 있지만 그 구체적인 형이 “棄市”로 되어 있 는 경우도 있다.( 舊唐書 卷6 「本紀」6 則天皇后 萬歲通天2年 神功元年 6월; 資治通鑑 卷206 「唐紀」22 則天后 神功元年 6월 丁卯) 40) 三國史記 에 의하면 경문왕대 “謀逆”과 관련한 기사가 등장하고 있다. 경문 왕 6년(866), 이찬 允興과 아우 叔興·季興이 謀逆하여 참형에 처해졌고,( 三國 史記 卷11 「新羅本紀」11 景文王 6년 10월) 14년(874)에는 이찬 近宗이 “謀逆 犯闕”하여 車裂刑에 처해졌다.( 三國史記 卷11 「新羅本紀」11 景文王 14년 5 월) 두 사건은 모두 “謀逆”사건으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진행과정이 사뭇 다르다. 윤흥 등의 모역사건은 일이 발각되어 실행되지 못했지만, 근종의 모역사건은 “犯闕”하여 실제 禁軍과의 격전이 있어났던, 즉 실행된 사건이었 다. 이는 謀大逆과 大逆에 해당할 것인데, 謀大逆에 대해서는 참형이 행해졌 고, 大逆에 대해서는 車裂刑이 행해졌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첫째는 謀 逆을 참형, 大逆을 거열형이라는 형률규정이 있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거열 형이 이 기사에만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형벌체계에 속해있는지 단언할 242 한국고대사연구 44(2006. 12) 형벌이 삭감되거나 폐지되는 완화된 형태로 그 방향이 잡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謀反사건은 6세기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大化 元 年(645) 古人皇子,41) 대화 5년(650) 蘇我山田大臣,42) 齊明 4년(658) 有 間皇子,43) 天武 元年(673) 養連五十君 및 谷直鹽手와 大友皇子44) 등 의 謀反 사건에서45) 그 처벌이 斬刑에서부터 絞刑, 流刑 등으로 나타나 고 있다. 모반사건의 핵심에 있었던 자들은 대부분 斬刑과 絞刑에 처해 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極刑”에46) 처해지기도 한다. 極刑에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중죄 8인에 대해서 내려진 형벌이고, 그 다음 右大臣 中臣連 金에게 斬刑, 左大臣 蘇我臣赤兄 등에게는 流刑에 처하는 것으로 보아 斬刑보다 가혹한 형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비교적 형률에 입 각하여 謀反사건이 처리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천무 5년(677) 에는 “三流”와 “徒罪” 등의 문구가 보여47) 당률을 체계적으로 섭취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48) 蘇我山田大臣과 大友皇子의 경우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蘇我山 수는 없다. 둘째는 실행여부를 떠나서 謀逆했다는 것만으로도 참형을 원칙으 로 하고 있으나, 거열형이 예외적 형벌로서 나타나게 될 가능성이다. 이때 거 열형은 당률에 의해 새롭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기존의 중고기부터 존재했든가, 아니면 당률 이전 율령체계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 다.(洪承佑, 2004 앞의 논문, pp.42~43) 41) 日本書紀 卷25 孝德天皇 大化元年 9월. 42) 日本書紀 卷25 孝德天皇 大化5年 3월. 43) 日本書紀 卷26 齊明天皇 4년 11월. 44) 日本書紀 卷28 天武天皇上 元年 7․8월. 45) ‘謀叛’ 사건으로는 계체 21년(527), 筑紫國造 磐井이 일으킨 “陰謀叛逆”이 있으 며 磐井은 다음해 大將軍 物部大連麤鹿火와 교전중 斬되었다.( 日本書紀 卷 17 繼體天皇 21~22年) 46) 日本書紀 卷28 天武天皇上 元年 7․8월. 47) 日本書紀 卷29 天武天皇下 5년 8월 壬子. 48) 당률의 전면적 체계적 섭취의 시기는 천무 8년 糾彈의 강화를 詔한 것이라든 지, 지통3년 刑部省의 判事 설치 등 사법기관을 정비해 나감과 아울러 이루어 진다고 한다.(李貞姬, 1991 앞의 논문, p.24) 7~8세기 신라의 형률과 그 운용 243 田大臣은 다시 참형을 받게 되고, 大友皇子는 그 머리가 군영에 바쳐지 는데, 이러한 自盡은 왕의 命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형벌과 관련 없이 스스로가 행한 일이다. 이러한 自盡은 관습적인 행태의 하나로 보 이지만, 결국 이러한 自盡과는 상관없이 형률에 따라 참형을 내리고 있 다.49) 이러한 관습적인 행태의 自盡은 신라의 경우 軍官과 嫡子 1인에 게 형벌로서 내려진다. 군관은 김흠돌의 난과 관련해서 ‘不告知罪’와 재 상으로서 公事에 이바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형을 받았다.50) 不告知罪 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교서를 통해서 “임금을 섬기는 법은 충성을 근본으로 삼는다”라는 왕과 신하의 관계 속에서 忠을 강조하는 것은 유 교적 이념의 표방과 나아가 귀족세력의 약화와 왕권의 강화라는 측면에 서 정치적 의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51) 自盡의 형벌은 이러한 맥락속 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당과 신라 그리고 일본이 율이라는 기본적인 체계에 맞춰 그 궤를 같이하고자 하면서 그 사회가 갖고 있는 형벌 내용의 전통적 모 습이 조금씩 탈각해나가고 있지만, 그 내용의 곳곳에는 여전히 각기 사 49) 신라 헌덕왕 14년(822), 反叛했던 김헌창이 패배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自死”하였으나 성이 점령된 후 종자가 각각 묻어놓은 김헌창의 머리와 몸을 찾아내어 “誅”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三國史記 卷10 「新羅本紀」10 憲德王 14년 3월) 50) 三國史記 卷8 「新羅本紀」8 神文王元年 8월 50) 당률에 의하면 謀反․大逆, 謀大逆․謀叛을 알고도 고하지 않으면 교수형 혹 은 流刑 2천리에 처해진다.( 唐律疏議 23 鬪訟3 第340條 知謀反逆叛不告) 則 天朝의 韓休의 伯父인 大敏은 역모사건과 연루된 것은 아니지만, 이를 추국하 는 과정에서 측천의 입장이 관철되지 않자 不告知罪로 얽어 賜死되었다.( 舊 唐書 卷98 「列傳」48 韓休) 대민에 대한 賜死는 당령에 의한 고위 관료에 대한 배려차원으로 보인다. 이처럼 군관의 경우 고위관직이었기 때문에 自盡의 형 이 내려졌을 가능성도 있으며, 신문왕의 교서로서 형이 내려지고 있기 때문에 常刑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唐六典 卷6 尙書刑部 “謂有殊旨 別敕 宜殺卻 宜處盡 宜處死…” ; 唐律疏議 卷30 斷獄2 第486條 輒引制勅斷罪 : 任大熙․ 金鐸敏 主編, 1998 譯註 唐律疏議-各則(下) , 한국법제연구원, pp.3352~3353) 51) 朱甫暾, 1984 앞의 논문, p.26, pp.37~38 ; 金瑛河, 2005 「新羅 中代의 儒學受容 과 支配倫理」 韓國古代史硏究 40, p.162. 244 한국고대사연구 44(2006. 12) 회에 있었던 전단계에서의 내용들이 투영되기도 한다. 군주권을 위협하 는 反․大逆․叛과 관련되어 공히 가장 최고의 형인 死刑을 내리고 형 률체계에 맞게 참형이나 교형 등으로 처벌하고자 하지만, 당의 경우 여 전히 車裂刑․支解刑․梟首刑․腰斬刑 등이 그대로 존속되었으며, 일 본에서는 極刑이 존재하며, 신라에서는 거열형이 등장한다든가(下代), 絞 刑이 보이지 않는 등 그 내용은 조금씩 다르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는 당률의 일방적 수용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수용된 율을 각 사 회가 갖고 있는 전통과 맞물려 변용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2. 官吏規制에 관한 형률 적용례 통치행위에 참여하는 관료집단에 대한 적절한 통제는 군주를 정점으 로 구축되어진 전근대 국가의 지배체제 유지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 이다. 이 때문에 군주는 제의와 예제 등을 통해 이념적 질서를 공표하고, 형률을 통해 현실적 규제를 완성한다. 현존하는 형률에 나타난 다양한 조항들은 대체로 그러한 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측가 능한 죄의 유형들을 형률에 규정하였다고 하더라도 모든 처벌이 반드시 형률대로 집행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군주의 권위는 율령보다 상위에 있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용서를 통해 형률의 엄격함은 군주의 관대함 을 부각시키기도 하며, 형률보다 강력한 처벌은 군주의 권위를 강화하기 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형률에 대한 접근도 조항에 대한 세밀한 분석과 비교에 앞서 통치행위의 일환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효율적 통치를 위한 군주의 관료 규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전쟁 수행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전쟁에 임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 고 군주의 이해를 충실히 대변하는 일은 국가의 안위와 관련된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목숨을 건 전장에서 충성스러운 행동강령을 표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600년대 초 원광의 세속오계에 등장하는 “臨戰無 退”의 정신은 분명 신라의 독특한 면이기도 하지만, 왕이나 황제의 국가 7~8세기 신라의 형률과 그 운용 245 영역 관리와 관련된 통치행위로서 일반적인 중요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 다. 중국의 경우 전쟁과 관련하여 北齊의 重罪 10조에 “降”의 항목이 있 고,52) 唐律에서는 군사동원의 준비를 갖추지 못한 자, 즉 군대의 征討에 임하여 징발하는 것을 지체하거나 그르친 경우,53) 전투에 임하여 먼저 물러난 경우 모두 참수형에 처하게 되며 軍令 위반의 경우는 회군 후 율 문의 규정에 따라 논죄한다고 한다.54) 아래의 사례들은 7세기 당에서 전쟁에 임한 관료들에게 어떠한 행동 을 요구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다)-1 武德 2년(619) … (李)靖과 (李)瑗은 … 이미 硤州에 이르렀으나, 蕭銑에게 막혀 오래동안 나아가지 못하였다. 高祖는 그 지체하여 머무는 것에 노하여 몰래 硤州都督 許紹에게 勅하여 斬하려 하였 다. ( 舊唐書 卷67 「列傳」17 李靖) (다)-2 咸亨 元年(670) … 吐蕃이 쳐들어오니 (薛)仁貴를 邏娑道行軍大總 管으로 삼아 將軍 阿史那道眞과 郭待封 등을 거느리고 공격하도록 하였다. … 仁貴는 드디어 退軍하여 大非川에 주둔하였다. 토번이 또한 40여 만(의 군사를) 더하여 오자 맞아 싸워 官軍은 大敗하고 仁貴는 드디어 吐蕃의 大將 論欽陵과 화의를 약속하였다. … 仁貴 는 除名(의 죄)에 처해졌다. ( 舊唐書 卷83 「列傳」33 薛仁貴) (다)-3 調露 元年(679) 10월 單于大都護府 突厥 阿史德溫傅와 奉職 2부가 反叛하였다. 阿史那泥熟匐를 可汗으로 삼아 24州 首領이 모두 叛 하였다.單于大都護 長史 蕭嗣業, 將軍 花大智․李景嘉 등을 보내 토벌케하였다. 돌궐과 더불어 싸웠으나 패하였다. 嗣業을 桂州로 流配하였다.( 舊唐書 卷5 「本紀」5 高宗下 調露元年) (다)-4 萬歲通天年(697)55) 契丹 李盡忠과 孫萬榮이 反叛하였다. … 則天 52) 隋書 卷25 志20 刑法. 53) 唐律疏議 卷16 擅興 第230條 乏軍興 : 任大熙․金鐸敏 主編, 1997 譯註 唐 律疏議-各則(上) , 한국법제연구원, pp.2353~2354. 54) 唐律疏議 卷16 擅興 第234條 主將臨陣先退 : 譯註 唐律疏議-各則(上) p.2358. 246 한국고대사연구 44(2006. 12) 이 (王)孝傑이 敗亡한 정황을 묻자 (張)說이 말하길, “孝傑은 忠勇 으로 죽음에 맞섰으니 진실로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적진에 깊이 들어가 적은 수로 많은 적을 감당하였으나, 단지 後援이 이르지 않 아 패배에 이른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孝傑을 追贈하여 夏官 尙書로 삼고 耿國公에 封하였으며, 그 아들 無擇을 朝散大夫로 삼 았다. 사신을 보내어 (후원을 맡았던) (蘇)宏暉을 斬하도록 하였으 나, 사신이 아직 幽州에 이르지 않았을 때 宏暉이 이미 功을 세워 贖罪하니 마침내 誅를 면하였다. ( 舊唐書 卷93 「列傳」43 王孝傑) (다)-1에서는 전쟁에 임한 관료가 적극적인 전투의지를 보이지 않는 점에 대해서 엄격하게 처단하고자 하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다)-2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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